서양에 사르트르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자가 있다!
프랑스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는 말로 인간의 주체성을 극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그 속이 비어 있다. 즉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태어남으로써 존재한 후에 자기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 가야 한다. 반면 다른 물건들은 그렇지가 않다. 대장장이가 칼이라는 것을 만들고 보니 날이 날카로우니 무언가를 자르는 용도로 써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자른다는 본질을 정하고 칼을 탄생시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는 정해진 역할과 본질이 없다. 이것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형벌이기도 하다. 차라리 칼처럼 역할이 정해져 있다면 정해진 대로 살면 그만이지만 정해진 역할이 없으니 끊임없이 자기 본질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지만 억지로 부여된 자유이므로 선고된 자유다. 스스로를 세상에 던진 존재가 아닌 던져진 존재의 운명인 것이다.”
실존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으로 존재라는 의미를 강하게 부각하기 위해 존이라는 글자 앞에 실제라는 뜻의 실을 갖다 붙인 말이다. 그저 태어났기에 존재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실제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서양에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철학을 20세기에 들어서 펼치기 시작했다면 동양에서는 2300년전에 이미 장자가 그보다 더 강한 어조로 인간의 주체성을 이야기했다.
장자
장자는 이름이 장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가 한창이던 기원전 4세기를 살다간 철학자이다. 공자나 노자 보다는 100년 정도 후대이며 맹자와는 동시대를 살았던 그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사르트르보다 더 인간의 주체성을 이야기했던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법과 질서,인륜마저 무너진 전국시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와 같은 세상에 꺼들리기보다 자기 스스로 즐거움에 취해 절대자유를 누리겠다 다짐하고는 그 말을 자쾌(自快)라고 표현했다. 장자의 자쾌를 보여주는 유명한 한 장면을 보자.
장자 책의 33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손꼽히는 장자 외편, 추수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가 복수라는 곳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초나라의 왕이 대부 두 명을 장자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왕께서 나랏일을 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장자는 낚시를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죽은지 3000년이나 된 거북을 왕께서 귀하게 여겨 비단으로 싸서 사당에 보관한다고 하더군요. 그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랬을까요 진흙에서 꼬리를 끌고 다닐지언정 살아 있기를 바랬을까요”
“물론 살아서 진흙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원했겠지요”
“돌아가시오, 나도 차라리 진흙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단지 장자가 권력을 멀리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과 윤리가 무너진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들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자신은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닐지언정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노자와 더불어 무위자연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노장철학의 대표 철학자인 장자를 현실에서 도피한 철학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장자는 자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자기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장자를 “기학무소불규(其學無所不闚), 학문에 있어서 들여다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부터 스스로의 덕을 쌓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끊임없이 실력을 쌓고 때를 만나 붕새가 되라
6만5천 글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장자라는 책의 내용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제1편 소요유편에서 장자는 절대자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북쪽 깊은 바다에 작은 알에 불과했던 곤이 스스로 덕을 쌓고 또 쌓아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 물고기로 변했다. 이 물고기는 자신의 크기를 키우다가 때를 만나면 등의 길이만 몇 천리가 되는 새로 변한다. 그 새를 붕이라 부른다. 붕이 힘을 모아 기운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붕새는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간다.”
장자는 결코 현실도피, 유유자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등의 길이가 수천리나 되는 붕새가 되어 절대자유를 누리기 위해 곤이라는 알에 불과했던 자신을 물고기로 먼저 키우라고 말한다. 이렇게 실력을 갈고 닦으면 반드시 때를 만나 붕새로 변화할 수 있다는 변혁을 이야기한다. 그때 자쾌도 가능하고 말이다.
성공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지금 붕새로 바뀌기 위해 나를 얼마나 키우고 있는지 돌아보자. 이 가을의 끝자락은 장자와 함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글 / 손정 와이즈먼코리아 겸임교수, [당신도 불통이다] [업무력] 저자
유튜브 : 책 읽어 주는 강사, sjraintr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