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도덕경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칭찬을 받더라도 놀라워하고 수모를 당하더라도 신기해하라'는 말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의미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 비난 받는 것을 싫어한다.
선거철이 되면 여기저기 유세차량이 많이 보인다. 차에는 여러 가지 홍보물이 붙어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후보자 번호다. 특히 지명도가 낮은 뒷번호로 갈수록 번호의 크기가 크며 유세 내용 중에도 수시로 번호가 등장한다. ‘나 여기 있으니 봐달라’는 의미다.
갓난아기 기저귀가 젖었을 때 우는 행위도 나를 봐달라는 의미며, 작가가 책을 출판하는 것도 나를 봐달라는 의미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모든 사람의 욕구가 이렇다면 칭찬 받았을 때는 기분이 좋고 비난 받았을 때는 기분이 나쁜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상황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게 인간의 삶이다. 사람은 자신은 칭찬받기를 원하지만 남을 칭찬하는데는 인색하다. 이런 가운데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늘 의기소침해 있고 한번 비난 받았다고 해서 그것에 사로잡혀 산다면 삶이 평안할 틈이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노자는 ‘칭찬과 비난을 모두 놀라워하라’는 해법을 내놓는다.
남이 나에게 하는 칭찬에 대해 놀라워 할 수 있다면 평소에 칭찬이 없는 상황도 잘 견딜 수 있다. 칭찬은 원래 희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난에 익숙하고 칭찬에 인색한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칭찬하는 상대를 관대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수모를 당하고 비난 받는 일에 놀라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다음의 이야기로 노자의 비난을 대하는 자세를 살펴보자.
장자 천도편에 수록된 이야기다.
사성기가 노자를 만나 물었다.
“저는 선생님께서 성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 뵙기를 원했고 100일 동안 발바닥에 몇 겹이나 못이 박혀도 감히 쉬지 못하고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을 뵈니 성인이 아니군요. 쥐가 구멍을 파서 쌓인 흙더미에 푸성귀가 흩어져 있는데도 그대로 두시니 이는 물건을 아끼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날 음식과 익힌 음식이 앞에 늘어놓을 수도 없을 만큼 이미 많은데도 오히려 한없이 끌어 모으고 계시더군요.”
노자는 무심한 듯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성기가 다음날 다시 와서 말했다.
“어제 선생님을 비난했는데 오늘 저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그런 생각들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까닭에서 그런 것일까요?”
노자가 말했다.
“지혜롭고 신성한 사람과 같은 것, 나는 스스로 그런 데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네. 자네가 나를 소라고 부른다면 나는 나를 소라고 생각할 테고 나를 말이라 부른다면 말이라 생각할걸세. 만약 나에게 어떤 사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그 사실에 따라 이름을 붙일 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같은 재앙을 거듭 당하는 것이야. 내가 따르는 것은 본성에 의해 그냥 따르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해서 따르는 것이 아닐세.”
노자는 생존 당시에 주나라 국립 도서관장을 지냈을 만큼 학식이 높고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사사로운 비판을 가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하고 남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평판이라고 한다.
노자는 남이 자신에게 가하는 평판에 있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노자 정도의 학식이라면 남이 자신에게 그런 비난을 가했을 때 ‘네가 감히 나를 평가해?’ 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노자는 비난 앞에 놀라워하고 신기해했다.
자기보다 한참 젊고 학식이 높지 않은 사람의 비판에도 ‘아, 내가 그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이 자신에게 가하는 비난을 새로워 한 것이다. 이처럼 남이 자신에게 가하는 비난에 대해 신기해 할 수 있다면 나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
노자는 자신의 책 도덕경에서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라고 말한다.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보이는 대로가 본질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의 눈에 보이는 내가 나의 참모습이 아닐까? 여기서 비난과 비판을 대하는 해법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상대가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겠구나’ , ‘이 비판을 근거로 나를 객관화해보자’ 와 같이 마음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노자의 말처럼 재앙을 피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의 비난에 대해 신기해하는 것은 원인을 외부로만 돌리는 귀인오류를 벗어나는데도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일의 원인은 자신에게서 찾고 부정적인 일의 원인은 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귀인오류라고 한다. 원인은 때에 따라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나에게 하는 비난에 대해 신기해 한다는 것은 비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않는 것에 해당한다.
상대의 성격이 이상해서, 상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르지 않아서, 나는 옳고 그 사람은 틀려서 나를 비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 경우다. 반면 ‘그동안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잘못을 상대가 찾아 주다니 놀랍다. 내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마음먹는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직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경기가 나빠서’ ‘경쟁자가 불공정해서’와 같이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야 말로 조직 내부를 보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그동안 잘 작동한다고 믿었던 우리의 시스템에 문제가 없는지, 조직 문화는 올바른지 살펴보고 놀라워 해야 한다.
寵辱若驚 총욕약경
총애를 받거나 수모를 당하더라도 놀란 듯이 하여라
도덕경 13장의 첫 문장을 실천할 수 있다면 외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로 보는 ‘정견’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글 : 손정, 와이즈먼코리아 겸임교수, [글쓰기와 책쓰기] [당신도 불통이다] [업무력] 저자
유튜브 : 책 읽어 주는 강사, sjrain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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