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청나라 금석학자 왕의영과 제자 유철운은 약재로 쓰려고 한약방에서 거북 등껍질을 구입한다.
탕약으로 다리기 위해 등껍질을 물에 씻던 유철운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과는 다른 특별한 흠집을 발견하고 스승에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누군가 장난으로 새긴 것이 아닌, 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한약방에 가서 이 껍질을 어디서 구했냐고 묻는다.
약방 주인은 은허라는 곳에 가면 이런 껍질이 아주 많다고 답한다.
이 은허가 바로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중국 왕조인 은나라의 수도이다.
이후 왕의영과 유철운은 갑골에 씌여진 문자를 해독하게 된다. 해독된 내용은 대부분이 은나라 왕실에서 전쟁과 같은 국가 대사를 시행하기 전에 하늘에 물어 점을 친 점괘였다. 이처럼 은나라는 종교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제정일치 사회였던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하고 인간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존재였다.
신의 뜻으로 다스리는 나라도 인간이 하기 나름,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이 달기에 빠져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산처럼 쌓아 주지육림으로 흥청망청하자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신의 뜻으로 다스리는 나라도 망할 수 있을까?
있다. 덕을 쌓은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에 의해서라면 가능하다. 이처럼 주나라는 자신들이 은나라를 대체하는 명분으로 천자를 내세웠다. 이후 주나라의 전반기인 서주시대와 후반부인 동주시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춘추시대까지는, 천자의 뜻으로도 세상을 다스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혈연으로 맺어진 주나라 봉건제도의 고리가 헐거워지고 우경, 철기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 사회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은 천명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와 힘이 있으면 누구나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졌다.
어지러워진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했다. 난세는 정신적 지도자를 불렀고 이때 등장한 사람이 노자와 공자이다.
새로운 질서는 자연을 닮는 것이다
공자가 천명을 대신해 내놓은 인간의 질서는 인(仁)과 예(禮)였다.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져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아도, 대부가 농사로 돈을 좀 벌었다고 제후 행세를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자의 주장이었다. 그 본질이란 부모와 자식간의 기본적인 법도를 말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 인간의 마지막 법도인 혈연을 씨앗으로 삼아 인간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씨앗이란 인(仁)을 말하며 궁극의 목적은 예(禮)를 말한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우리가 익히 아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그러나 노자의 생각은 달랐다. 인과 예, 의미는 모두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기준이 되는 순간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배척하고 폭력성을 띠게 되므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기준을 만들지 말자고 주장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억지로 하는 것은 유위(有爲)다. 인간이 만든 기준이 아닌 자연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르는 것, 그것이 무위(無爲)다. 무위자연(無 爲自然), 인위적으로 기준을 만들지 말고 자연이 행하는 모습을 따르라,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도(道)인 것이다. 이러한 도를 노자는 도덕경 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이유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자신을 앞세우지 않을 때 결국 앞서게 됨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릴 때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노자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길이 결국 자기가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면 내세우지 않더라도 남들이 다 알아준다는 의미다. 리더십으로 말하면 지시하는 리더가 아닌 먼저 희생하는 서번트 리더십과 같다. 천장지구,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이유는 책임을 다 하되 드러내지 않음에 있다. 우리 역사에도 이와 같은 리더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과 명나라 장군 진린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해군 도독 진린은 400척의 배와 5,000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다. 정식 직함은 조명연합수군사령관으로 이순신도 진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진린은 성품이 거만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유성룡의 ‘징비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조(明)의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000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합세했다. 진린은 성질이 거칠고 포학하고 교만한 자다. 진린은 자기 군인들이 조선의 수령을 구타하며 모욕을 주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또한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장차 이순신의 군사가 안타깝게도 패하겠구나. 진린과 진중에 함께 있으면 행동을 견제당할 것이고 의견이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이 학대당할 것이다’
남의 나라에 원군으로와 싸울 의욕이 없는데다 성품까지 만만치 않은 상급자 아래서 왜군과 맞서야 하는 이순신, 그가 행한 것이 바로 도덕경 7장이 말하는 도였다. 이순신은 철저히 자신을 뒤로 물리고 진린을 대한다. 그리고 결국 왜군을 일본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진린은 조선에 온 뒤 맞이한 첫 전투에서 구경만하고 참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모든 전공을 진린에게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 거둔 모든 전공은 바로 대장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모두 대장에게 드릴 것이니 승전보와 함께 이 전과를 명나라 황실에 아뢰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이날 전투에서 노획한 왜선 6척과 수급 69개를 진린에게 넘겼다.
이에 진린이 매우 즐거워하며 “본국에서 장군의 명성을 많이 들었는데 거짓 명성이 아니었구려” 하며 이순신의 넓은 마음에 감복했다.
이후 이순신은 나갈 때 마다 승리하고 모든 공을 진린에게 돌린다.
진린은 단지 공을 얻어서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인품과 전술에 반해 중국어로 극존칭에 해당하는 이야(李爺)라고 이순신을 부르며 존경하게 된다.
그 후 뇌물을 주며 퇴로를 보장해달라는 일본군의 회유를 뿌리치고 노량해전에 이순신과 함께 참전한다. 결국 이순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낸 것도 그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진린의 손자 진조는 조부가 머물렀던 고금도로 옮겨와 정착했고 이후 그의 아들 석문이 해남 황조마을로 이주해와 한 마을을 이뤘다. 조선에 정착한 후손들은 진린 장군을 시조로 삼아 광동(廣東) 진(陳)씨 가문을 개창했다.
오늘날 전국에 있는 광동 진씨는 2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2018년 전남 완도군은 장보고 기념관에서 '이순신과 진린, 420년만의 재회'란 주제로 고금도 통제영과 조명수군 활동 재조명 국제 학술 세미나를 가졌다. 하늘과 땅이 장구하듯 이순신의 리더십도 장구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때 결국은 앞서게 된다는 말은 노자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라고 말했고 석가모니 역시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무주상보시, 내가 무언가를 베풀었다는 마음조차 없이 주어라’ 라고 말했다.
2021년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나는 지금 바라지 않고 결과를 미리 생각하지 않은 채 과정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글 : 손정, 와이즈먼코리아 겸임교수, [글쓰기와 책쓰기] [당신도 불통이다] [업무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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