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첩에 있는 수많은 명함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나의 명함에 절대값 기호를 씌우고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미사여구를 떼어 버린 후 광야에 섰을 때 온전한 나의 실력만으로 가치를 창출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프로젝트 매니저란 직책을 붙이고 사람을 고용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은 그가 성과를 내는 것일까 고용된 사람이 성과를 내는 것일까?
설령, 실력으로 가치를 창출한 실적이 있다 하더라도 ‘생명의 서’에서 유치환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지식에 독한 회의를 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리더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실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키우는가?
실력이란 실제로 갖추고 있는 힘을 뜻하며, 그 힘이 곧 성과를 만들어 낸다. 내가 갖추고 있는 힘이 진정한 실력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나와 마주하는 일이며 나를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를 알고 참된 힘을 키우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접 부딪치고 넘어지고 연습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방법과 책과 배움을 통해 얻는 방법, 두 가지밖에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지독한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기타리스트 장대건
지금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클래식 기타리스트 장대건. 어릴 때 합기도를 좋아했던 그는 다리를 다쳐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형을 통해 우연히 클래식 기타를 접하게 된다. 잠잘 때도 기타를 안고 잘 정도로 기타에 푹 빠진 그는 배우면 배울수록 기타의 본고장인 스페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클래식 기타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고비아가 죽고 없으니 세고비아의 제자 호세 토마스의 수제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소 무모한 꿈을 안은 채 열일곱의 나이에 홀연히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꿈을 따라 떠나 왔지만 말도 안 통하는 하숙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그에게 다가온 건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이었다. 그때 그는 깨닫는다. 두려움을 없애는 길은 실행뿐이라는 것을.
3년간 바르셀로나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끝에 호세 토마스가 있는 알리칸테 음악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 뒤 각종 콩쿠르에 입상하였고 이제는 자신이 콩쿠르의 심사위원이 되는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보다 스페인의 정서를 더 잘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를 키워 준 건 오직 연습이었다.
다산 정약용
양반으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정약용은 천주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신유박해, 기해박해를 당하며 자신은 물론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 난다. 그로 인해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500권의 저서를 남겼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아들에게 했던 말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느 날 다산은 아들로부터 닭을 키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몰락했으나 양반의 자식으로 닭을 키운다면 우리는 무어라 말했을까?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기왕 닭을 키우기로 했으면 닭에 대한 경전을 써보아라.”
닭이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며 그 생태는 어떠한지, 먹이를 바꾸어 가며 실험도 해가면서 닭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뜻이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우리 직장인들에게 다산의 말을 빌려 다산의 아들이 닭에 대한 경전인 <계경>을 썼듯이 자신의 업무를 통해 얻게 된 경험과 지식을 경으로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누구나 미래는 두렵다.
‘이 회사에서 어디까지 승진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여기서 나간다면 무얼 해서 먹고살 것인가?’
기타리스트 장대건의 말처럼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실행뿐이다. 실행의 과정은 릴케의 말처럼 부단한 인내를 요구한다. 그 인내의 결과물로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내 일에 대한 ‘경’인 것이다.
실력을 키우는 두 번째 방법은 독서다. 책은 단순히 글씨가 쓰인 종이 묶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경’이다. 그 책을 쓰기까지 축적된 저자의 삶을 풀어낸 것이다. 어떻게 배울 것이 없겠는가?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눈으로 읽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읽은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노트에 옮겨 적고 때때로 다시 읽어 보는 것이 좋다. 인간의 기억력은 의외로 신통치 않다. 읽을 때는 공감하고 감동했던 내용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배울 것이 없는 내용의 책이라도 기억해 둘 만한 한 문장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문장은 반드시 노트에 옮겨 적어 놓아야 한다. 컴퓨터에 옮겨 적을 수 있다면 더 좋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책을 읽고 중요한 곳은 밑줄 치고 컴퓨터에 옮겨 적은 후, 출력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읽는다고 한다. 광고계의 일인자가 된 비결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혹자는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말고, 읽고 싶은 책을 읽어라’, ‘마음 가는 대로 읽어라’ 하고 말한다. 그 말도 맞다. 책은 분야에 따라 각각 저마다의 통찰을 주기 때문에 어떤 책이라도 읽고 느끼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 먼저다. 읽어야 할 책의 분야를 정하고 분야마다 희망 독서목록을 만들고 읽기 시작하라. 처음 다섯 권 정도만 정해놓고 시작해도 그 다음은 책이 책을 낳아 준다. 앞의 책 저자가 참고한 문헌이나 글 속에서 언급하는 책들을 자연스레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바쁜 직장 생활이지만 열흘에 한 권은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밑줄 치고 노트에 옮겨 적자. 옮기는 과정에서 한 번 더 공부가 된다. 그리고 그 노트는 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읽는 습관을 갖자.
이렇듯 자신의 일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경’을 쓰고 독서를 통해 얻은 것을 옮겨 적어 수시로 읽어 간다면 누구든지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이다.
나의 지식에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서 본연의 나와 마주하겠다는 유치환의 시를 기억하며, 실력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으면 한다.
글 : 손정, 와이즈먼코리아 겸임교수, [당신도 불통이다] [업무력] 저자
유튜브 : 책 읽어 주는 강사, sjrain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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